속보116:세월호 참사 한달 좌절 분노 통곡의 30일
모두 구조될 줄 알았는데 실종생존자는 구조 못해
끝 모를 슬픔 전국분향소 182만 여명 조문 다녀가
모두 구조될 줄 알았는데 실종생존자는 구조 못해
끝 모를 슬픔 전국분향소 182만 여명 조문 다녀가
"세월호 참사는 사고라고 보기보다는 선장 등 승무원들의 살인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어른의 말만 듣고 기다리다 탈출못했고, 가장먼저 신고를 했다. 아이들은 아무런 잘못없는데 희생됐으며 사고 후 잘못한 어른들은 그대로 살아 있다. 세월호의 침몰에 따른 참사는 총체적인 인재로 우리 사회에 돌이킬 수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우리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이지 못해 초래된 참사로 기록될 것이다."
인천~제주항로를 운항했던 국내 최대 규모 정기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지 15일로 한 달째가 되면서 각계로 부터 나타나고 있는 요약된 반응이다.
침몰된 이 선박의 제원은 6825톤급 카페리로, 길이 145m, 폭 22m, 여객 정원 921명, 차량 180대,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52개를 동시 싣고 운항할 수 있도록 돼 있으나, 현재 검경합수부와 구속기소된 승무원 진술에 따르면, 과다한 화물선적에서 비롯된 복원성 상실과 운항미숙에서 발생한 참사로 침몰 원인이 추정되고 있다.
여객선 세월호가 이처럼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그간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채 700여시간이 흘렀지만 23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4월 16일 이후 좌절, 분노, 통곡의 30일이었다.
14일 정오까지 단원고 탑승인원 339명(교사 14명) 중 학생 235명과 교사 7명을 포함한 242명에 일반인 탑승객 34명 등 276명이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후 5명이 추가로 수습돼 DNA 검사를 통해 신원 확인작업이 진행 중이다.
전체 탑승객 476명의 36%에 해당하는 172명만 배에서 탈출했다. 야속한 시간이 흐를수록 이번 사고는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를 넘어선 사상 최악의 해상 참사로 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서해훼리호는 정원 221명을 훌쩍 넘긴 무리한 승선으로 침몰, 탑승객 362명 중 292명이 숨졌다.

◇ 초등대응 못하여 세월호 304명과 함께 침몰
"여기 배인데 여기 배가 침몰하는 거 같아요."
4월 16일 오전 8시 52분 119로 전화한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최덕하 군의 다급한 목소리로 세월호의 침몰은 처음 외부에 알려졌다. 수학여행길에 오른 단원고 학생 325명, 교사 14명, 승무원 33명, 일반 승객 104명 등 476명(잠정)이 승선해 서해안 바닷길을 달리고 있었다.
세월호는 전날 오후 6시 30분 제주를 향해 인천항을 출항할 예정이었지만 안개 때문에 2시간 30분가량 늦게 출항했다.
당일 인천여객터미널에서 출항하려던 모든 여객선이 안개때문에 결항했지만 세월호만 출항하여 불길한 전조를 무시했다. 세월호는 16일 8시52분 조난신고 후 전남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3km 앞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태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이날 오전 9시 30분 목포해경 123함(110t급)을 시작으로 해경과 해군의 경비정, 헬기, 해난구조대(SSU)·해군 특수전전단(UDT/SEAL) 등 최정예 인력 장비가 총출동했다는 소식에 국민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차분히 구조 장면을 지켜봤다.
그러나 모두 구조되리라 믿고 눈과 귀를 기울였던 방송뉴스는 결과적으로 304명의 사망 실종 실황을 중계한 꼴이 됐다.
이날 결국 구조된 인원은 172명이 전부였다. 해경 123정은 사고현장에 도착하자 마자 선미쪽의 승객들을 뒤로 하고 선수쪽에 먼저 탈출한 속옷 차림의 이준석(69) 선장 등 선박직 승무원 15명을 구조하게된다.
"절대 이동하지 말고 선내 그대로 대기하세요"라는 안내 방송만 믿고 기다리던 승객들을 위한 선내 진입의 구조활동은 방송되지 않았다.
"배가 기울고 있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이는 오전 10시 17분 세월호에서 보낸 마지막 애절한 내용으로 학생의 카카오톡 메시지다.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방송은 안 나와요", "해경이 왔어. 언론에 속보도 떴어" 등의 메시지 내용으로 미뤄 승객들은 침몰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고도 선내 방송만을 믿고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기는 등 '살신성인'한 선박 매니저 박지영(22·여)씨는 마지막 메시지가 발신된 뒤 한 시간여만인 오전 11시 18분 첫번째 사망자로 발견됐다.
◇ 민관군 합동구조팀 침몰 후 생존자 구조 못해
이틀째인 17일 해경, 해군, 관공서, 민간 선박·헬기와 잠수사들은 수중, 수상, 공중에서 입체 수색을 이어갔다. 그러나 사고 해역은 수중에 펄이 많고 조류가 강해 선내 수색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았다.
물살이 약한 '소조기', 강한 '대조기', 물의 흐름이 멈추는 '정조시간' 등 생소했던 용어들이 점차 익숙해졌다. 같은날 이준석 선장은 피의자로 전환돼 수사를 받았다. 검·경 합동수사본부도 구성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실종자 가족이 모여있는 진도 체육관을 찾아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으로 책임질 사람은 엄벌토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과가 빠진 위로에 대통령은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여론에 부닥치기도 했다.
선수만 겨우 물밖으로 내놓고 있던 세월호는 18일 완전히 침몰했다. 인솔 책임자로 세월호에 올라탔다가 구조된 강민규(52) 단원고 교감은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민관군 합동구조팀은 침몰 나흘째인 19일 밤 선체 유리창을 깨고 처음으로 선내에 진입, 선내 공기층인 '에어포켓'에 희망을 걸었던 생존자 구조의 기대를 허망하게 깨뜨렸다. 그후 날이 갈수록 수습된 시신만 늘어갔고 실종자의 생환 소식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자치단체 등이 준비한 축제는 대부분 취소됐으며 지방선거 출마자들의 선거운동도 중단됐다.
경기도 안산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 합동분향소를 바롯해, 서울 등 전국 각지의 분향소에는 수만~수십만여명에 이르는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 청해진해운 세월호를 과적 화물선적 후 운항
단 한 명의 실종자도 구조하지 못한 데 대한 실망과 좌절로 가득했던 4월을 지나 5월을 맞았다. 꼬리를 무는 의혹과 불신은 절망감을 분노로 바꿔놓았다.
선박직 승무원들의 파렴치한 비정한 행태, 청해진해운과 그 주변 업체들의 허술한 입출항 등 관리,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경영비리 의혹, 무능함도 모자라 선장을 해양경찰관의 집에 재우고 언딘과 유착 의혹에까지 휩싸인 해경, '해피아'라는 치욕적인 별명을 얻은 해양수산부 등 '비정상'의 징후가 잇따라 드러나게 된다.
17일째인 2일에는 침몰 지점에서 남동쪽으로 2㎞가량 떨어진 곳에서 시신이 수습됐다.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시신 유실에 대비해 수상 수색 범위를 넓혔으며,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낀 3~6일 연휴에도 "시신이라도 찾아달라"는 실종자 가족의 통곡은 팽목항을 덮었다.
5월4일 두 번째로 진도를 찾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 실종자 가족은 "지금 가서 보세요. 형체도 못 봐요. 형체가 없어졌어요. 부모로서 형체도 못 알아본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애국하러 가겠다"며 진도를 찾아 수색작업에 참여한 민간 잠수사 이광욱(53)씨는 6일 숨졌다.
같은날 대책본부는 선내 111개 공간 중 승객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 64개 객실 문을 모두 열었다고 발표했다. 곧이어 찾아온 어버이날에도 빨간 카네이션 대신 노란 리본이 팽목항을 감쌌다. 기상 악화와 선체 내부 칸막이 약화 현상 등으로 수색작업은 10일 오전부터 사흘간 중단되기도 했다.
침몰 30일째인 15일 가장 먼저 탈출하고, 가장 먼저 구속된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15명은 검찰에 의해 기소된다.
최덕하(첫 신고자)군, 박지영(첫 사망자)·강민규(교감)·이광욱(잠수사) 씨 등 지금은 이름만 남아있는 의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국민의 부름에 법원이 응답할 차례다.
◇사망 실종 304명 구조에 826차례 수중 수색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긴 채 700여시간이 흘렀지만 23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다.
14일 정오까지 단원고 탑승인원 339명(교사 14명) 중 학생 235명과 교사 7명을 포함한 242명에 일반인 탑승객 34명 등 276명이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후 5명이 추가로 수습돼 DNA 검사를 통해 신원 확인작업이 진행 중이다. 전체 탑승객 476명의 36%에 해당하는 172명만 배에서 탈출했다.
야속한 시간이 흐를수록 이번 사고는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사고를 넘어선 사상 최악의 해상 참사로 남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서해훼리호는 정원 221명을 훌쩍 넘긴 무리한 승선으로 침몰, 탑승객 362명 중 292명이 숨졌다.
해양경찰 집계에 따르면 세월호 침몰이후 구조와 시신 수습을 위해 연인원 1693명의 잠수요운이 826차례에 걸쳐 수중 수색에 나섰다. 하루 평균 56명의 요원이 동원돼 27차례 수색이 이뤄진 셈이다.
이들은 맹골수로의 빠른 물살과 싸우며 온 힘을 쏟고 있지만 아직도 23명은 아직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의 통곡은 팽목항을 뒤덮고 있다.
◇전국 애도의 물결 127개 분향소서 182만여명 조문
온 나라가 슬픔에 빠진 가운데 희생자 실종자 가족을 도우려는 따뜻한 손길은 사고 30일째 15일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실종자 가족이 머문 전남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으로 2만5천258명의 자원봉사자가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구호물품도 72만5천168점이 도착했으며 이 가운데 담요 등 25종, 64만412점이 지급됐다. 또 희생자 270명의 영정이 안치된 경기 안산 정부 공식합동분향소에서는 1만3천428명의 자원봉사자가 유족을 위로하며 밀려드는 조문객의 편의를 도왔다.
공식 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은 32만5천464명이다. 지난달 23일부터 28일까지 운영된 임시 합동분향소 조문객 수를 합하면 50만5천843명이 희생자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공식 합동분향소 말고도 경기 31개, 서울 24개 등 전국 17개 시·도에 126개의 분향소가 차려졌다.
이 분향소에는 131만9천95명이 찾아 공식합동분향소를 포함한 모든 분향소에서 182만4천938명이 조문을 마쳤다. 공식합동분향소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에 뜨는 추모 문자메시지는 10만7천419건이 들어왔다.
희생자·실종자 가족과 슬픔을 나누려는 마음은 성금으로도 이어졌다.
전국재해구호협회(목표 모금액 700억원), 대한적십자사(100억원), 국민일보(10억원), 바보의나눔(3억원), 대한나눔복지회(3억원), 한국재난구호(1억원), 대한안마사협회 대구지부(2천만원) 등 7개 단체가 안전행정부 또는 단체가 있는 시도에 국민성금 모금단체로 등록했다. 등록 의무가 없는 1천만 원 미만 모금 단체 상당수도 성금을 걷고 있어 희생자·실종자 가족에게 물질적으로나마 도움의 손길이 미칠 전망이다.
◇검경합동수사본부 파렴치한 선장등 15명 기소해
4월16일 침몰한 세월호의 탑승 승객의 구조를 외면하고 탈출하여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세월호 선박직 승무원 선원 15명 가운데 이준석(69) 선장, 1·2항해사, 기관장 등 4명에게 살인 혐의가 적용돼 기소됐다.
검경합동수사본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 30일째 15일 광주지검 목포지청에서 브리핑을 하고 이 선장 등 선원 15명을 구속기소한다고 이같이 밝혔다. 이날 기소 주체는 광주지검으로 재판은 광주지법에서 열린다.
선장에게는 부작위에 의한살인, 살인미수, 특정범죄 가중처벌법(도주 선장) 위반, 업무상과실 선박매몰, 수난구호법 위반, 선원법 위반 혐의가 적용됐으며, 1등 항해사에게는 주위적으로 살인·살인미수·업무상과실 선박매몰·수난구호법 위반 혐의가, 2등 항해사와 기관장에게는 살인, 살인미수, 수난구호법 위반 혐의가 각각 적용됐다.
검찰은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가 무죄 판단을 받을 경우에 대비해 예비적으로 유기치사·상 혐의를 의율했다.
나머지 선원 11명은 유기치사·유기치상·수난구호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부작위(不作爲)에 의한 살인은 운항 관리를 소홀히 해 세월호가 침몰하게 하고 사고 후에도 탑승 승객들과 동료 승무원들을 구하지 않고 탈출해 숨지게 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특히 승객들에게는 "대기하라"고 지시한 뒤 가장 먼저 탈출해 공분을 샀다.
인천지검 해운비리 특별수사팀도 세월호 실소유주인 유병언(73) 전 세모그룹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계열사 대표 등 7명과 청해진해운이 보유한 선박에 대한 안전점검을 제대로 하지 않은 해운조합 운항관리자 2명 등 9명을 구속했다. 합동수사본부와 검찰 수사가 진행될수록 사법처리 대상은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다음은 30일간의 세월호가 출항 침몰후 현재까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4월 15일 = 오후 9시. 세월호 승무원·승객 등 476명(잠정) 태우고 인천항 출발. 안개 때문에 2시간 30분 지연.
▲ 4월 16일 = 오전 8시 52분. 단원고 2학년 최덕하(사망)군 전남소방본부 상황실에 첫 신고. "배가 기울고 있어요".
= 오전 9시 30분. 목포해경 경비정 123함 현장 도착.
= 오전 10시 17분. 단원고 학생 마지막 카카오톡 메시지 발신. "배가 기울고 있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
= 오전 11시 18분. 선수 일부만 남기고 사실상 침몰.
= 오전 11시 20분. 경기교육청 대책반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확인 '혼선'.
= 오전 11시 35분. 첫 사망자 박지영씨 발견.
▲ 4월 17일 =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0시 현재 사망자 6명 발표.
= 오후 4시 20분. 박근혜 대통령, 실종자 가족 모여 있는 진도체육관 방문.
▲ 4월 18일 = 오전 11시 50분. 선수 부분까지 물에 잠겨 완전 침몰.
= 오후 3시 38분. 민관군 합동구조팀 선체 2층 화물칸 문 열고 선체 첫 진입.
= 오후 4시. 강민규 단원고 교감 진도체육관 인근 야산서 숨진 채 발견. "모든 책임지고 갑니다" 유서.
▲ 4월 19일 = 오전 2시. 이준석 선장 등 승무원 3명 구속.
= 오전 11시 40분. 사망자 50명으로 늘어
= 오후 11시 50분. 객실 진입 성공. 단원고생 시신 3구 수습.
▲ 4월 20일 = 오전 9시. 실종자 가족들 진도대교서 총리면담 요청 연좌농성. "청와대 가겠다"며 진도대교서 경찰과 대치.
▲ 4월 22일 = 오전 9시. 사망자 100명 넘어서.
▲ 4월 23일 = 오후 6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 "끝까지 구조한 뒤 선박 인양" 발표.
▲ 4월 27일 = 오전 10시. 정홍원 국무총리 참사 책임지고 사의 표명.
▲ 4월 29일 = 오후. 사망자 200명 넘어서.
▲ 5월 1일 = 오전 3시 20분. '논란' 다이빙 벨 투입 뒤 철수. 이종인 알파 잠수기술공사 대표 실패 선언.
▲ 5월 2일 = 오전 6시 30분. 침몰 지점 남동쪽 2㎞ 지점서 시신 발견.
▲ 5월 4일 = 박근혜 대통령, 진도 다시 방문해 실종자 가족들과 비공개 면담.
▲ 5월 6일 = 오전 6시 5분. 민간 잠수사 이광욱 씨 작업 중 의식 잃어 1시간 30분 만에 사망.
▲ 5월 7일 = 오후 8시 20분. 해경 항공대원 대기 중 쓰러져 의식 불명. 수술 후 의식 회복.
▲ 5월 10일 오전~13일 오전 = 기상 악화, 선체 칸막이 약화 현상으로 수색 중단.
▲ 5월 15일 = 이준석 선장 등 주요 승무원 15명 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