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버스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저희 세창에서는 매달 신명용 변리사의 1일 IP Newsletter, 11일 토마스 김 미국변호사의 영문 뉴스레터에 이어, 매달 21일에 소속 변호사들이 돌아가면서 주로 담당하고 있는 법률업무와 관련하여 평소 고객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던 이야기들 또는 소개드리고 싶은 판례를 짧게 다루는 국문 뉴스레터를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번호에서는 당법인 파트너 변호사이며 얼마 전에 영국 유학길에 오른 이연주 변호사가 영국에서 보낸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안녕하세요? 법무법인 세창의 안영환 변호사입니다.
히드로공항에서 내셔널익스프레스라는 버스를 이용하면 카디프까지 오는 데 세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중간에 브리스톨에 잠시 버무는 버스가 있고 곧바로 오는 버스도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탄 버스는 브리스톨에서 15분 정도 쉬었는데, 문제는 제가 화장실을 이용하고 또 영국의 커피는 어떤 맛인가 하는 호기심에 커피를 사는 동안 버스가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제 여행용 수트케이스와 배낭을 싣고서.
우리나라 고속버스는 버스기사가 승객의 수를 세어 휴게소에서 다 탈 때까지 기다려주고 안내방송도 합니다만, 영국은 절대 그런 것 없습니다. 그리고 브리스톨에서 쉬는 것은 중간정류장의 개념이어서 내릴 사람은 내리고 거기서 탈 사람은 타는 것이기 때문에(나중에 알았지만) 버스기사는 누가 내리고 탔는지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도착할 시에 고지한 정시에 그냥 떠납니다.
놀라서 브리스톨 버스정거장의 사무소로 뛰어갔는데, 꼬장꼬장한 영국 할머니가 마구 야단만 칩니다. 제가 잘 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이 영국 할머니는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버스도 승객을 기다리지 않는다. 니 손에 든 커피는 뭐냐. 정차시간이 커피사먹으라는 시간이 아니다' 어쩌고 하면서 매서운 눈초리를 제게 쏘아 보냅니다.
어휴. 그래도 목적지인 카디프 터미널에 전화해서 이런저런 조치는 취해줍니다.
영국의 물가는 살인적이어서 세시간 버스여행 차비가 40파운드 약 7만원이 넘습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서울에서 진주까지 4시간 반인데, 대략 3만원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삯만 비교하면 두배가 넘는 셈입니다.
그런데 브리스톨에서 카디프에서는 버스로 한시간이 걸리는데, 차비는 1/3이 아닌, 1/2인 20파운드, 4만원입니다. 눈물을 머금고 차표를 다시 샀습니다.
Do as Romans do in Rome 라더니 옛말이 그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속담 역시......
카디프에서 만난 북한 동포
카디프는 웨일즈의 주도인데, 웨일즈는 주류인 잉글랜드와는 민족이나 언어가 다릅니다. 잉글랜드는 앵글로색슨, 웨일즈는 켈트족이 뿌리이고, 또 웨일즈는 웰쉬라는 영어와는 다른 고유의 언어가 있습니다. 각종 문서나 도로표지 등에서도 꼭 영어와 함께 웰쉬어를 병기합니다. 카디프대학에서 제게 보내는 각종 문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는 웰쉬어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인 것 같고, 일상생활에서 웰쉬어로 소통하는 것은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영어가 넘 안 들릴 때는 이 작자들이 혹시 웰쉬어로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 적은 있습니다만.
웨일즈가 지역적으로나 민족적으로 주류가 아니고, 또 외국인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척 친절한 편입니다. 왜 주변부끼리는 통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는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제법 있는데, 영국이 정치적 망명을 비교적 용이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통 할머니는 아니고, 출신성분이(북한말로는 토대라고 한다고 합니다) 무척 좋으셔서 중앙당간부까지 지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북한을 탈출하셨고, 그 후 남편은 중국 공안에 잡혀 압송당한 후 사형당하고, 큰아들은 같이 일하던 중국인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뇌수가 쏟아진 채로 집에 돌아왔는데 병원에 갈 수 없어 시름시름 앓다가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에 정착한 뒤로는 같이 탈북한 딸과 사위와 함께 열심히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큰아들을 죽게 한 중국인들을 청부살해 할려고요. 그런데 기독교에 귀의하고 나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라는 깨달음에 그런 마음을 버렸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경력이 경력인 만큼 노무현 정부때 통일정책 고문도 하고,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시에 자문도 하였다고 합니다. 잠실에 상당히 넓은 아파트에 살만큼 기반도 잡았고요. 그리고, 손녀딸을 위해 영국에 왔고 지금은 손녀딸과 같이 영국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또 한 탈북부부는 갓난장이 아들이 소아암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유아, 어린이는 민족 기타 출신을 묻지 아니하고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영국의 정책 때문에 한국돈으로 1억원이 넘는 치료비를 영국정부가 지원해 주어 무사히 치료받고 있습니다. 그들 부부가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으나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고 심사단계여서 애매했는데, 잘 처리되어 생명을 구하였습니다.